‘서사 투쟁’을 피할 수는 없다

  • 호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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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6-01

.상간녀소송 2024년 정치인 이준석이 종편방송에 나와 뉴라이트를 맹비난한 적이 있었다. 뉴라이트가 과거사나 국가 정체성 이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왼쪽에 있다가 넘어와가지고 굉장히 뿌리가 약하니까 세게 하는 분들이다. 그러니까 역사밖에 건드릴 게 없는 거다.” “지금은 민생 이슈로 승부 봐야 되는데 역사 논쟁으로 승부 보려고 하는데,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같이 나이가 들어서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다.”8 현재의 민생 이슈를 제쳐두고 과거 역사만 이야기하는 것이 물론 칭찬할 일은 못 된다. 하지만 이준석의 발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주장이다. 국가 정체성 서사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전장의 하나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극우 정치세력은 현실의 문제를 규정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기하는 준거점으로 국가 정체성 서사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다. 비록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허구일지라도, 극우는 세계의 인식론적 지도와 구체적인 목표를 대중에게 제공하고 있다. 반면 기득권 중도자유주의 세력의 서사는 갱신되지 못한 채 탈역사적 시장주의와 개인화된 도덕주의에 침전되어버렸고, 급진좌파는 정치적 생존이 불투명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사는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혀 있을 뿐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고 소통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서사 투쟁’, 정확히 말해 ‘기억과 서사를 둘러싼 투쟁’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이는 또한 공동체 기억과 서사 속에 담긴 가치질서, 곧 무엇이 더 정당한 가치인지를 놓고 끝없이 투쟁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만 ‘서사과잉’은 피해야 한다. 서사과잉은 “사실에 바탕해서 서사를 엮어내는 게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사실을 욱여넣는” 것이다.9 결국 서사를 상대화한다는 것은 서사과잉을 피하면서 서사 투쟁에 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국뽕’ 서사 같은 무조건적 긍정성이나 편집증적 음모론들은 피로와 냉소로 귀결하기 마련이다. 서사의 설득력은, ‘도파민 터지는 드라마틱함’보다는 기억과 서사에 담긴 가치질서에서 나온다. 서사가 정체성에 직결된 것일 때, 최근 미국이 보여주듯 치열한 논쟁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준석의 발언은 금세 잊히고 사라졌지만, 뉴라이트의 서사는 20년째 호출되고 있다. 뉴라이트는,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을지 몰라도 정체성 서사가 사회정치 담론의 급소라는 사실을 어떤 우익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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